Ⅷ. 남방 여러나라 대 고구려 공수동맹
제1장 네 나라 연합군의 합전과 고구려의 퇴각
- 신라 백제 양국의 관계와 비밀동맹의성립
장수왕의 남진정책은 일시적으로 백제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결국 신라, 백제, 가라가 연맹을 결성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며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대변화를 초래했다. 이 연맹의 중심 역할을 신라가 맡았으므로, 이와 관련된 경과를 살펴보기에 앞서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 간 관계의 기원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신라는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먼 반면, 백제와 인접해 있어 고구려보다는 백제와의 관계가 더 복잡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와 백제 사이의 관계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삼국사기에는 탈해이사금 이후 신라와 백제가 매년 200명 내외의 소규모 병력을 동원해 와산과 봉산 같은 지역을 차지했다 뺏겼다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신라는 당시 경주 일대의 작은 국가였던 반면, 백제는 온조왕 시절 이미 마한 50여 나라를 통합한 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나라가 매년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내보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또 다른 예로 두 나라가 때로 화목한 관계를 맺은 적도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언제나 백제가 먼저 신라에 화친을 요청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백제는 신라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였으므로 이러한 기록 역시 의문이 제기된다. 게다가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가라 6국과 사벌, 감문 등의 완충국이 존재했음에도 백제가 이들 나라와 충돌하지 않고 곧바로 신라를 침략했다는 점도 의아하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후일 백제를 원망하는 감정이 깊어져, 백제 멸망 후 관련 기록을 수정하거나 조작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의 삼국지, 남사, 북사 등에 따르면, 초기에는 신라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외부 기록들이 신빙성이 높게 평가될 수 있다.
- 신라-백제-임나(任那)·아라(阿羅) 네 나라의 대 고구려동맹
장수왕이 신위례성을 공격하자, 근개루왕의 태자인 문주가 신라로 와서 급박한 상황을 알렸다. 이에 신라는 동맹의 의리뿐만 아니라 자국 방어를 위해 출병할 수밖에 없었다. 자비마립간은 군사 만 명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그때는 이미 근개루왕이 사망하고 신위례성이 함락된 상태였다. 결국 문주왕은 수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물러나 웅진으로 천도했다. 웅진은 광개토왕의 비문에서 언급된 고모나라로, 이는 '곰나루'라는 같은 뜻을 이두식으로 쓴 것이다. 현재 공주 지역이 과거 '곰나루'에 해당한다.
당시 한강 이남에는 신라와 백제 외에도 가라를 비롯한 여섯 나라가 있었으며, 이들은 현재 경상남도 지방에 세력을 나누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가라가 종주국으로서 임나, 아라, 고자, 고령, 벽진 등 다섯 가라를 거느렸으나, 시간이 흐르며 신가라와 다른 세 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임나와 아라만 강성하게 남아 신라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광개토왕이 왜를 정벌할 때 두 나라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도와 왜군과 싸운 바 있다. 하지만 나중에 신위례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두 가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자국 보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신라와 백제 역시 두 나라의 힘만으로 고구려를 막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신라와 백제는 두 가라의 동맹 가입을 권유했고, 결과적으로 신라·백제·임나·아라 네 나라가 고구려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수동맹을 맺게 되었다.
장수왕은 신라가 이전의 고구려 원조―광개토왕이 왜군을 물리친 은혜―를 잊고 백제와 연합한 것에 분노하였다. 이에 481년에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신라 동북부를 침공하였다. 당시 소지마립간이 직접 비열홀(현재의 안변)에서 방어하였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고구려 군대는 승리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해 고명(현재의 회양) 등 7개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백제의 동성대왕은 두 가라국과 연합하여 각기 다른 길로 나누어 고구려 군을 응원 공격하여 격파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
- 40년 계속된 네 나라 동맹
네 나라의 동맹으로 인해 장수왕의 남진 정책이 좌절되고, 백제와 신라는 자주적으로 자신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백제 동성대왕이 해외를 정벌하며 고구려 이상으로 강한 나라임을 뽐내던 시기까지도 이 동맹은 지속되었다.
494년, 신라가 살수(현 대동강 상류 부근)에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다가 견아성에서 포위되자, 백제 동성대왕이 3천의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물리치고 포위를 해제시켰다. 이듬해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반걸양을 공격하자, 신라 소지마립간이 구원병을 보내 고구려군을 퇴각시켰다. 이 동맹은 약 40여 년간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동맹이 해체된 이후에야 신라가 가라 지역으로의 침략을 시작한 것으로 드러난다.
제 2 장 백제의 위(魏) 침입 격퇴와 해외 식민지 획득
- 동성대왕 이후 다시 강성해진 백제
백제는 신위례성이 함락되고 외세의 위협이 극심한 상황에서 내란까지 빈번히 발생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문주왕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곰나루(熊津)로 천도하였으나, 천도 후 4년(연표에는 3년) 만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 해구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그의 맏아들인 임근왕(壬斤王, 본기에서는 三斤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또 다른 이름인 壬乞로 미루어 보아 三斤의 '三'은 王의 잘못으로 보인다)이 13세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임근왕은 즉위 이듬해에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 등과 함께 비밀리에 모의하여 반역자 해구를 처단하는 성과를 거두며 영민한 통치자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즉위 3년 만에, 겨우 1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고, 그해인 서기 479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동성대왕의 본명은 마모대(摩牟大)로, 전사의 기록에서 마모(摩牟)로 적힌 것은 마지막 글자를 생략한 것이고, 모대(牟大)로 기록한 경우는 앞 글자를 생략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의 즉위 당시 나이는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임근왕의 종질(종제: 사촌 간 혈육 관계)인 점으로 보아 열댓 살 정도였을 것이다.
동성대왕은 어린 나이에도 복잡하고 어려운 정세를 맞닥뜨렸으나, 타고난 지혜와 능숙한 활쏘기 실력으로 고구려와 북방의 위 세력을 물리치며 국난을 평정했다. 더 나아가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산동성과 절강 지역 등을 점령하고 일본을 정벌하여 속국으로 삼는 등 수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당시 천재지변으로 발생한 몇 차례의 홍수와 가뭄, 왕의 사냥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을 뿐, 기타 중요한 업적들은 누락되어 있다. 이는 신라 말기의 문사들이 고의로 삭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다음에는 그의 간략한 생애와 업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 장수태왕의 음모와 위병(魏兵)의 침입
이 시기, 황하는 남북으로 나뉘며 위(魏)와 제(齊)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위는 선비족(鮮卑族) 척발씨(拓跋氏)가 모용씨(慕容氏)의 연(燕)을 대신하여 세운 나라로, 그 세력이 대단히 강대해져 당시 유일한 강국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장수왕은 남쪽 네 나라의 동맹으로 인해 백제를 직접 공격하지 못하자, 사람 손을 쓰지 않고 교묘한 계책으로 제3국을 이용하여 백제를 먼저 격파하게 하고, 자신은 뒤에서 이득을 취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해마다 황금과 명주 10되를 위왕에게 바쳤으나, 3년 뒤에는 예실불(芮悉弗)이라는 사신을 빈손으로 보냈다.
위왕이 그 이유를 묻자, 예실불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비부여(泗此扶餘)에는 황금산이 있고, 섭라(涉羅, 현재의 제주)에는 명주연이 있어 황금과 명주가 무한히 났습니다. 이전에는 이를 채취해 폐하께 바쳤지만, 이제는 사비부여가 백제의 수도가 되었고 섭라 또한 백제가 정복하여 황금산과 명주연이 모두 백제의 손에 들어가 우리 고구려인은 그 보물을 구경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폐하께 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이를 들은 위의 왕과 신하들은 이 말을 신뢰하며 백제를 공격해 황금산과 명주연의 보물을 차지하려는 욕망이 생겼고, 결국 동쪽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삼국사기에서는 위서에서 내용을 가져와 예실불의 일을 고구려 장수왕의 아들인 문자왕 시대의 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양 예씨 족보에 따르면, 예실불을 예씨의 시조로 간주하며, 그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간 이야기를 앞선 내용과 유사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위나라가 북쪽으로 고구려, 남쪽으로 제나라와 맞닿아 있었던 상황에서, 멀리 바다를 건너 백제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해운이 불편했던 고대의 특성을 고려할 때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위나라는 단순히 예실불의 말에 속아 황금과 명주를 얻기 위해 움직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위나라의 백제 침입은 장수왕 시대에 있었으며, 문자왕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삼국사기의 연대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기보다는 남양 예씨 족보의 내용을 신뢰합니다.
- 위병의 두 차례 침입과 두 번의 패배
지나 대륙의 국가들 중 조선에 침입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그 군사의 수가 약 10만에 이른 것은 척발씨의 위(魏)가 시초이다. 이에 맞서 이러한 대규모 침략군을 처음으로 격퇴한 사람은 백제의 동성왕이었다. 위서(魏書)는 당시 패배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이를 기록하지 않았고, 삼국사기 역시 백제의 업적을 질투하여 신라 중심의 역사 기술로 해당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남제서(南齊書)에 그 개략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도 당태종(唐太宗)의 방해로 대부분 누락되었으며, 겨우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 일부만 남아 사실의 단편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국서의 원문 여부와 관련해서는 박연암 선생이 “중국은 남의 시문을 자의적으로 고쳐 중국을 ‘수방’이나 ‘원방’으로 쓴 표현을 ‘황도’ 혹은 ‘대방’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감정적인 시 또는 글도 그러한데, 하물며 국가적인 사안을 담은 국서는 더욱 심했으리라 짐작된다. 우리가 남아 있는 국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기원후 490년 위(魏)에서 두 차례에 걸쳐 수십만 보병과 기병으로 백제를 침공했다.
2) 첫 번째 전투에서 동성왕은 삭녕장군 면중왕 저근, 건위장군 팔중후 부여고, 건위장군 부여역, 광무장군 부여고를 보내어 적병을 크게 격파했다.
3) 두 번째 전투에서는 정로장군 매라왕 사법명, 안국장군 벽중왕 찬수류, 무위장군 불중후 해례곤, 광위장군 면중후 목간나를 출전시켜 다시 적병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며 수만 명을 처단했다.
4) 두 번에 걸친 승리를 발판 삼아 동성왕은 국서와 우격(적국에 급히 보낸 전문)을 여러 나라에 보내 이를 과시했다.
5) 쇠약해진 백제의 국운을 회복하고 해외 경략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6) 당시 주요 출전 장군으로 저근, 사법명, 부여고, 부여역,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 전선의 길이나 전투 기간 등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며 첫 번째 전투가 육전이었던지 해전이었던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두 차례 전투에서 각기 네 명의 대장이 지휘를 맡았을까? 이는 백제가 부여나 고구려처럼 중(中), 전(前), 후(後), 좌(左), 우(右)의 5군 제도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동성왕은 중군 대원수로 전체를 통솔하고 나머지 네 대장은 각 군을 맡아 지휘한 것이다. 또한 저근이나 사법명이 동성왕의 신하임에도 ‘왕’의 직함을 갖게 된 이유는 조선의 고유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신(伸)’은 대왕을 가리키며 천자를 의미하는 번역이고, ‘왕’은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小王)으로 칭호된 것이다.
- 동성대왕의 해외 경략과 중도에 돌아가심
조선 역사상 바다를 건너 영토를 확장했던 사례는 백제의 근구수왕과 동성왕 시대로 한정된다. 특히 동성왕 시대에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이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의 *백제전*에 명시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려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언급된 월주는 현재의 회계 지역에 해당하며, 이 일대가 모두 백제의 영토였다. 또한, 문헌비고에서는 "월왕 구천의 옛 도읍을 둘러싼 수천 리가 모두 백제의 땅이었다"고 전하며, 이는 곧 그 시기의 백제 영토를 설명한 것이다.
'고려'라는 명칭은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지칭하던 이름이다.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 서쪽, 즉 오늘날의 봉천 서쪽 지역 역시 모두 백제 소속으로 기록된다. 만주원류고에서는 금주, 의주, 애훈 등의 지역이 백제에 속했던 바를 언급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왜'는 현재의 일본으로, 구당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전체가 백제의 속국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백제는 성왕 초기 고구려와의 패배, 말기에 신라와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국력이 쇠락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해외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성왕은 이러한 전공을 세웠으면서도 자연재해가 심각했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사치스럽게 임류각이라는 호화로운 건물을 짓고 그 주변에 정원을 조성하며 진귀한 새와 물고기를 기르는 등의 사치를 부렸다. 또한 사냥을 즐기며 자주 외출하였는데, 501년 11월 사비부여 마포촌에서 사냥 중 큰 눈으로 인해 체류하던 중, 그를 원망하던 위사좌평 가림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나이는 겨우 30대 초반이었으며 재위 기간은 23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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